[서동민 칼럼] 삼국유사, 그 역사 현장을 찾아
[서동민 칼럼] 삼국유사, 그 역사 현장을 찾아
  • 황연경 기자
  • 승인 2018.10.23 17: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동민 논설위원/부산대총동문회 사무국장
서동민 논설위원/부산대총동문회 사무국장

부산대 인문학과정 역사문화답사가 20일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있었습니다. 많은 유적 가운데, 삼국유사에 담긴 역사 현장을 찾아, 당시의 정치적 상황, 사회적 배경, 문화적 역량 등을 살펴보는 자리였습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쓴, 일명 한국불교 문화사로도 불린답니다.

그동안 숱하게 방문한 경주였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나요. 조원형 합천박물관 관장님의 해박한 지식과 귀에 속속 들어오는 설명으로, 이제 천년 왕국 신라의 일면이 조금은 이해되었고 또 신비했습니다. 역사기행 코스는 경주 남산 서출지,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첨성대, 황룡사지, 분황사, 감은사지 순서였습니다. 선선한 날씨에 가을 단풍까지 어우러져 참 좋은 하루였습니다.

1. 서출지(書出池) - 신라는 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불교의 공인이 150여년이나 늦어졌을까?

서출지는 신라 21대 소지왕의 '사금갑(射琴匣-거문고 갑을 쏘아라)' 전설이 서린 곳, 이 못에서 글이 나와(書出) 그래서 서출지라 불리고, 그로인해 궁중의 승려와 궁주의 내통과 간계를 막았다는 그곳입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를 통해 이차돈의 순교(527년)로 불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신라의 전통 민간신앙과 새로운 종교 불교간의 갈등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서출지는 여름에 찾아오면 연꽃이 만개하고 배롱나무가 흩날리고, 이요당(二樂堂)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이 된다고 합니다. 이요당은 당시에 건립된 것이 아니고, 조선 현종 5년(1664년) 이곳에 머물렀던 임적이 세운 건물이고, '이요'는 논어의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따온 것이라네요. 여름에 꼭 한번 다시 오리라 다짐해 봅니다.

2.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 통일신라 초기 석탑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왜 그 규모가 작아졌을까?

동서(좌우) 쌍탑에다 그 모양을 달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탑 하나에 이렇게 깊은 의미가 있을 줄이야!

동·서 삼층석탑은 옛 양피사터(?)에 위치합니다. 동서 두 탑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단아한 석탑입니다. 기단의 한 면을 둘로 나누어 총 8개로 조각된 팔부신중이 참 특이했습니다. 그것을 일일이 자세히 설명하는 관장님도 참 대담했습니다.

3. 첨성대 - 첨성대는 과연 별을 관찰하던 곳인가, 아니면 제단인가? 첨성대가 평지(平地)에 있다는 것, 첨성대 자체의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 등으로 제단이라는 이견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천문대는 여러 기록으로 보아 고대의 천문을 관측하던 천문대라 불렸으며, 천문현상의 관찰로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의 목적도 있었으므로, 제사나 점복과 가까울 수도 있다 하네요.

한창인 핑크뮬리와 어울려 관광객이 엄청났습니다.

4. 아~ 황룡사여! - 황룡사는 완성되기까지 진흥왕에서 선덕여왕까지 무려 100년이 걸렸답니다. 9층목탑은 그 높이가 80m에 이르러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절터의 규모는 불국사의 8배 규모이며, 황룡사 범종은 남아 있는 최대의 범종인 성덕대왕신종의 4배였답니다. 당시 신라 최대의 사찰, 그런 보물이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그 모든 게 완전히 전소하고 말았다니...

5. 분황사 - 선덕여왕은 어떻게 해서 최초로 여왕이 되었을까? 그리고 왜 그리 많은 절과 탑을 건립했을까?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모전석탑(模塼石塔-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입니다. 이 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랍니다.

분황사, 황룡사, 사천왕사, 감은사로 이어지는 행렬... 이로써 천년왕국 신라, 호국불교의 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6. 감은사지 -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최초의 석탑에다 그 규모도 엄청났습니다, 금당터는 통풍을 위한 독특한 기단 설계가 특이했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여,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고, 절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문무왕이 절이 완공되기 전에 죽자,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 하였습니다.

절터 앞으로는 대종천이 흐르는데, 대종천은 왜구가 감은사 대종을 훔쳐 배에 실고가다 무게로 빠뜨리고 말았다 하여 대총천이라 불렸다네요.

경주가 고향이신 인문학과정4기 이원태 회장님은 파도가 치면 물속 중소리가 울렸다는 얘기가 있었다며, 예전 UDT요원들이 몇일을 샅샅이 물속을 뒤졌으나 끝내 그 종을 찾지 못했다고 해 재미를 더했습니다.

이번 역사문화답사로 또 한번 지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김종수 인문대학장님이 틈틈이 재미난 질문과 설명을 곁들여 주셔서 더욱 유익했습니다. 아울러 인문학과정 좋은 원우님들과 함께 해 더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인문학은 30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헤맬 때 중심이 되어준 고마운 학문입니다. 인문학이 있었기에 길흉화복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과 사회를 더 넓혀 이해할 수 있었고, 많은 통찰의 지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부산대 인문학과정을 강추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