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 토성, 김해 봉황동 유적 남쪽서 발굴
가야시대 토성, 김해 봉황동 유적 남쪽서 발굴
  • 정창민 기자
  • 승인 2020.12.0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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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적 2호 봉황토성 범위 구체화 중요한 실마리 제공"
"4~5세기대 토기들 조사돼, 금관가야 토성으로 판단"
김해 봉황토성 조사대상지역 원경(남-북)(사진제공=김해시)
경남 김해시 봉황토성 조사대상지역 원경(남-북)(사진제공=김해시)

[가야일보 경남동부지사=정창민 기자] 김해시 봉황동 유적(국가사적 제2호) 남쪽에서도 가야시대 토성(봉황토성)의 일부(내·외벽)가 발굴됐다.

지금까지 남쪽 토성의 범위는 추정만 하던 상황이어서 이번 발굴은 봉황토성의 위치 비정(比定)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설명이다.

김해시(시장 허성곤)는 봉황토성 남쪽 중앙지점(봉황동 240번지 일원) 265㎡에 대한 학술발굴조사를 지난달부터 (재)한화문물연구원에 맡겨 이번 주 완료할 예정이라고 3일 밝혔다.

가야시대 생활유적인 봉황동 유적을 중심으로 토성의 흔적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학계는 서민, 귀족, 왕의 생활터전을 타원형의 토성으로 보호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론해 시는 왕궁터 등의 발굴을 기대하고 있다.

2003년 봉황토성의 내․외벽이 북동쪽 구간에서 일부 조사됐고 2014년 북동쪽 구간에서 외벽 일부가 확인됐으며, 올해 2월부터 7월까지 조사한 남서쪽 구간인 옛 봉황초등학교 부지에서 토성의 외벽시설이 넓게 조사됐다.

이처럼 봉황토성 조사구간들은 북동쪽과 남서쪽에 주로 치우쳐 있어 봉황토성의 남쪽과 동쪽의 범위는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석렬(石列)을 통해 추정만 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봉황토성의 그간의 조사 성과와 토성의 성토부에서 4~5세기대 토기들이 조사됨에 따라 금관가야 토성으로 판단된다.

이번 조사구간에서 확인된 성벽의 바닥 너비는 13.1m, 상단 너비는 8.6m이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내벽부 0.9m, 외벽부 1.7m 정도이다. 외벽의 돌이 15단 정도 덮여 있고 내벽은 돌들이 5단 정도 남아 있다.

토성의 구조는 기존에 파악한 봉황토성의 것과 동일한데 목탄과 패각 등으로 인위적으로 다짐해 대지를 조성한 층(해발 2.4m)위에 점성이 강한 적갈색 점토와 혼토패각, 소성토 등의 흙을 섞어 자연 경사면을 따라 겹겹이 쌓아 성의 성토부를 만든 후 내벽과 외벽에 돌로 덮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또 대지 조성층에서 직경 6~10cm 내외의 탄화된 나무기둥과 바로 세워서 땅에 파 묻은 토기 항아리 2점이 조사됐는데 대지 조성 내지 성 축조 시의 의례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는 “이러한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국가사적과 보호구역 확대 지정 등을 추진해 봉황동 유적의 보존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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