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제 2의 도시는 전통적으로 행정, 역사, 인구수 그리고 상징성에서 부산광역시가 오랫동안 지켜왔다. 그러나 아주 최근에 경제적 지표를 기준으로 인구변화의 추이와 지역내 총생산, 경제 및 일자리, 도시 인프라 등을 놓고 봤을 때 인천광역시가 급부상하면서 제 2의 도시로 가기 위한 타이틀 경쟁이 두 도시 간에 더욱 가열되고 있다.
산(山)과 천(川)의 차이는 물흐름과 지형적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산(mountain)은 주위 평지보다 솟아오른 고정된 높은 선형의 육지지형인 반면에 천(river)은 지표면에 내린 빗물이나 지하수를 따라서 모여 흐르는 물길로 선형의 수계지형이다.
자연생태계와 인류문명에 있어서 산과 천은 서로 각각이 가진 절대적인 중요성 때문에 우열을 나타낼 수 없다. 인류문명의 발상지로서 물류와 교통 및 생존필수 자원의 관점에서는 천(川)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구의 물탱크 및 녹색 댐의 역할을 가진 수자원의 원천이 시작되는 곳, 육상생물 종의 다양성 보고로서 지구의 온도를 조절하는 거대한 기후조절 장치로서는 산(山)이 중요하다. 즉 산은 천을 만드는 어머니이고 천은 인류를 기르는 젖줄인 셈이다. 어느 한쪽이 중요하다는 구체적인 근거와 논리의 필요보다 일반적인 관점과 체감으로 보고 느끼면 될 것이다.
천은 인류의 생존, 경제활동, 도시의 발달 측면과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산은 지구생태계의 근본적인 유지 측면에서 모든 수자원과 생태계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에서 각각 서로의 역할에 따라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산은 머리이고 천은 혈관과 같다. 산에서 물이라는 생명력을 공급하지 않으면 혈관은 마를 것이고 혈관이 온 땅을 돌며 수분을 공급하지 않으면 지구라는 몸은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산과 천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 유지시스템인 것이다.
내가 인천 부평(仁川 富平)에서 군 복무를 할 때 아버지가 인천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처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인천을 수차례 다녀 왔었다. 인천 부평은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지금은 개성) 근처의 거대한 요충지이자 곡창지대였다. 그 규모가 오늘날의 인천광역시(부평구, 계양구, 서구), 경기도(부천시), 서울특별시(구로구, 강서구) 일대를 아우를 정도였다. 부(富)의 부평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기가 고려시대이다. 1310년(고려 충신왕 2년)에 전국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부평부(富平府)라 명명한 것이 역사상 최초의 등장이다. 고려시대 부평은 풍요로운 땅이 되라는 뜻의 부자 부(富)자를 1310년에 얻으면서 역사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바다와 가깝고 평야가 넓어 국가의 군마(軍馬) 육성지로서 국가 차원의 주요 목마장이었다. 부산 또한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목장지대였다.
고려시대 그 당시에 산과 강 그리고 바다까지 가까이 있던 부평과 또 다른 지역에서의 지명으로 삼포지향(三抱之鄕) 부산이 있었다. 똑같은 시기에 부(富)의 지명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평(富平)과 부산(富山)은 국가로부터 대우와 주민들의 신분 그리고 행정적 격에서 큰 차이를 받았다. 부평은 오늘날로 치면 대도시에 해당하는 부(府)였다. 정상적인 세금을 내면서 과거시험도 보고 관직에도 진출해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부산도 부자 산(富山)마을이었지만 주민들은 실제로 가난한 삶을 살았으며 과거시험 응시는 원천적으로 금지되었고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었던 특수집단 행정구역의 변방마을인 부곡(部曲)이었다. 부곡이라는 자체가 이미 국가에 종속된 차별집단이라는 뜻을 명확히 담고 있기에 그 앞에 붙어있던 부산(富山) 지명까지 굳이 나쁜 글자로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지역 원래 가지고 있던 지명인 부산을 그대로 두고 뒤에 부곡만 붙여서 부산부곡(富山部曲)이 된 것 같다. 인천 부평의 富는 땅이 넓고 기름져 주민들과 함께 풍요로운 도시라는 긍정적인 의미였다면 부산의 富는 자원과 물산은 풍부했으나 정작 주민들은 차별받고 살던 변방의 작은 마을이라는 아픈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 지금의 부산항 근처에 특수집단 행정구역에 해당하는 부산부곡(富山部曲)이 고려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되면서 수많은 부곡이 없어지고 부산부곡의 지명은 부산(釜山)으로 바뀌게 된다. 산의 모양이 가마솥 닮았다. 고유어 가마 음을 한자로 빌려 쓰는 과정에서 변화되었다.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가 많았다. 지명의 유래나 역사적 변화, 또는 글자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한 형성자(形聲字)의 결합 방식 때문에 부산으로 되었다는 가설들이 있다. 또 왜인(倭人)들이 가마가 많은 지역이라 부산(釜山)으로 부르다 보니 되었다는 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조선 태종~성종 시기를 거치면서 국가지리서를 정비하는 과정에 富山을 釜山으로 지명을 개명시켰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와 문헌에는 솥을 형태와 용도에 따라 부(釜), 정(鼎), 노구(鑪口)솥으로 명확히 다르게 구분해서 사용했다.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솥인 노구, 아궁이가 없어도 땅위에 바로 세워 불을 지피면서 사용 가능한 다리가 달린 정과 달리 가마는 다리가 없는 솥으로 아궁이나 부뚜막에 고정해서 걸어두고 사용하는 크기와 용량이 매우 거대한 취사 용기다. 크고 넉넉하다의 뜻이 담긴 富자를 조선은 무엇 때문에 釜로 바꾸었을까? 왜 富平의 지명은 바뀌지 않고 富山만 釜山으로 고쳤을까? 이유는 단순히 글자만을 바꿨다기보다는 당시 성리학적 이념과 지배 체제의 확립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깊게 깔린 듯하다.
조선 초기 지명에서 富자를 사용하지 않거나 꺼리게 된 데에는 배경이 있어 보인다. 사리사욕을 탐하고 재물을 모으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낮게 보면서 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한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부자(富)라는 글자를 쓰는 것에 기피했었을 것이다. 특정 지역이 상업이나 무역(특히 왜관을 통한 일본과의 밀무역 등)으로 지나치게 부유해지거나, 부(富)를 강조하는 것이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 지역을 통제하는데 어렵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부산부곡(富山部曲)을 없애는 과정에서 지명을 풍요롭고 부유한 부산(富山)이라는 지명보다는 눈에 보이는 지형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가마솥 모양의 부산(釜山)으로 변경하여 부르도록 하는 것이 조선의 유교적 통치 이념에 더 부합했을 것이다.
이후 부산(釜山)은 1426년(조선 세종 8년) 일본과의 평화적 교역을 위해 삼포개항(三浦開港)을 하면서 부산포(釜山浦)를 열어주었으나 1510년에 일본인들이 부산포에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로 군사와 백성들이 끝까지 싸웠던 부산진성(釜山鎭城),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과 함께해서 대승을 거둔 부산포대첩(釜山浦大捷)이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포를 최초의 근대 개항장으로 열게 되었다. 개항 이후 근대화의 첫 문을 연 부산은 일제강점기와 피란수도 시절을 거치고 마침내 세계적인 수출관문이 되면서 부산(釜山)은 우리나라 제 2의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2026년 부산은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에 있어서 우리나라 도시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어우러진 다이내믹한 도시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해양수도 부산이 북극항로가 열리는 날에는 세계 3대 항로의 중심이자 글로벌 해양수도권의 핵심 거점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 거점에는 부산의 부산항(釜山港)이 있으며 부산항의 북항 바다에는 늘 함께하고 있는 동천(東川)이 있다. 동천은 우리나라 근대산업경제의 발원지이다. 동천 옆 문현금융단지(부산국제금융센터와 부산은행 본점)는 해양·선박 금융 및 파생상품 특화 금융의 중심지로 핵심 중추 경제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