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그래도 된다
[기자수첩] 그래도 된다
  • 박정애 기자
  • 승인 2018.09.2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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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다고 해도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도 반드시 온다
박정애 기자
박정애 기자

민족 대명절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추석은 5일 연휴로 짧지 않은 시간이다. 직장에서 잠시 멀어져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안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울상을 짓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은 여성이다. 명절이 다가올수록 '명절증후군'도 함께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들이 받는 고통은 상상 이상이다.

나는 형제, 자매가 없는 외동딸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유일한 여성이고, 사촌들 사이에서는 첫째이다. 그래서인지 남들이 말하는 '외동딸'이라는 개념에서 조금 떨어져있다고 생각한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귀한 외동딸'이라는 건 대게 있는 집의 경우이며,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여성은 어머니를 대신해, 혹은 남자 형제나 집안의 어른을 위해 부엌으로 들어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조금 더 어렸을 때에는 '여자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정도로 생각했으나 지금의 나는 이것을 '가부장제의 피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는 물론 다수의 여성이다.

오늘날의 차례·제사상을 준비하는 모습만 보아도 그렇다. 남자들은 술상에 둘러앉아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술잔을 기울인다. (그 상도 여자들이 준비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는 사이 여자들은 대체 무얼하고 있느냐하면, 부엌 한켠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기름 튀는 팬 앞에서 뒤집개를 쥐고 있다. 손가락에는 밀가루와 계란이 덕지덕지 묻어있고 기름 쩐내가 진동해 후덥지근한 그 '한켠'을 못 벗어난 채로 말이다.

어린 날의 나도, 지금의 나도 여전히 그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있다. 우리 집은 가부장적이고 거기에 반박하는 내 목소리는 크지 않기 때문에 쉽게 묵살된다.

어느 날은 시끄러운 안방이 서러워 물은 적이 있다. "이걸 왜 나만 해?" 돌아오는 대답은 "집에 여자가 너밖에 없잖아."였고 그때의 상실감과 알 수 없는 패배감을 잊을 수 없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워 그 후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차례와 제사의 유래는 조선의 유교사상에서 전해내려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이 여성들의 노동이 당연했느냐? 그렇지도 않다. 그때의 '양반'들은 여성들에게 제사상에 관여,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직접 음식을 마련하고 상에 올리며 오로지 '남성'들만의 문화로 여겨져 여성은 당연히 배제되어 왔다. 이 또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양반 노릇'에 심취한 가정을 보면 차라리 그때가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은 여자들이하고 생색은 남자들이 내는 아이러니가 불편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오롯히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28살의 미혼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명절증후군, 스트레스가 이 정도인데 기혼 여성이 가지는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일까를 감히 가늠할 수 없다.

때문에 주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번 기자수첩을 위해 주변의 지인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명절에 차례상 준비가 힘들지는 않나. 어떻게 하고 있는가?" 답변은 생각보다 명쾌했다. "안 해. 안 가. 도망가." 그래도 되냐는 걱정은 필요없었다. "없으면 알아서 하더라고." 덧붙이는 말이 인상 깊었다. 그동안 노동을 도맡아서 하던 이들의 부재는 생각 외로 타격이 크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하는 일인데 다른 사람이 못 할 이유도 없다. 여성들만의 짐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명료한 답변을 뒤로 하니 어쩐지 홀가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없다고 해도 세상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지당한 사실이다.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도 반드시 온다.

마지막으로 내게 인상깊은 답변을 해 준 미스 김과 동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녀들의 말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소탈히 전한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지? 아니다. 다 알아서 굴러간다. 걱정 말고 놀아라. 그래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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