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역사인물] 이수생 장군, 뛰어난 궁마술로 왜적 참살
[양산역사인물] 이수생 장군, 뛰어난 궁마술로 왜적 참살
  • 신정윤 기자
  • 승인 2018.11.26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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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면 가산리 금정산 기슭에 묘소
왜란이 끝난 후 고향서 칼 씻으며 은거
벼슬자리를 거부하고 늙은 아버지 모셔
동면 가산리 금정산 기슭의 이수생 묘소.
동면 가산리 금정산 기슭의 이수생 묘소.

 

[양산일보=신정윤 기자] 금호 이수생(1551~1612)은 조선이 백척간두의 위험에 빠졌을때 분연히 일어나 싸운 의병이다. 곽재우 장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앞장서서 싸웠다. 그의 묘가 낙동강을 바라보는 금정산 가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너른 평지 위로 수백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다. 마치 그를 따르는 휘하 장병같다. 묘지 앞에는 그의 호를 딴 연안 이씨 재실인 금호사가 있다. 

금호 선생의 12세손 이용부(75)씨는 찬찬히 선조의 묘소를 둘러본다. 그는 "할아버지는 논공행상으로 벼슬을 준다고 해도 거부하셨다. 이런 부분이 우러러 보인다"고 말했다. 이곳 이수생 묘소는 양산시에서 편백나무를 심었다. 어린 편백나무가 크면 후세 사람들에게도 그의 행적을 생각하며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가 될 것 같다. 

금호사 내부에는 선생의 상상화가 있다. 부산의 연안이씨 후손이 당시 문헌 등을 참고해 그렸다. 그림에는 갑옷과 화선지, 벼루가 그려져 있다. 문무를 모두 갖춘 선생의 풍모가 느껴진다. 

금호 선생은 1551년 탄생했으며 42세의 나이에 치마자락을 찢어 창의의병의 깃발을 내걸었다. 부산에 상륙해 양산으로 들어 온 왜병을 참살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바치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가 쓰던 칼과 유물들이 현재의 금호사로 이전하기 전에 화마에 소실됐다. 그러나 그의 증손이 쓴 <금호창의록>이 남아 선조의 행장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이 책을 문중과 논의 후에 시립박물관에 기증하는 방법도 고민중에 있습니다" 

이수생 선생 12세손 이용부씨가 양산군수 어윤중이 쓴 비문을 살펴보고 있다.
이수생 선생 12세손 이용부씨가 양산군수 어윤중이 쓴 비문을 살펴보고 있다.

 

금호 선생은 양산에서도 활약했지만 언양, 경주, 그리고 화황산에서는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도 함께 싸웠다. 왜란이 끝나고 고향 양산 금산에 들어와 폭포수 아래에서 운둔했다. 금정산 용추폭포에는 아직도 그가 칼을 씻으며 은둔했다는 세검정 바위가 있다. 

그는 효심도 뛰어났다. 왜란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시묘살이를 할때도 호랑이가 그를 보살폈다고 전해진다. 왜란이 끝난 후에 아버지를 여의고서도 호랑이가 그를 보살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양산에 군수로 부임한 어윤중도 그의 후손의 요청에 의해 비문을 적었다. "일개 서생으로 뛰어난 궁마술을 발휘하며 한손에는 군검을 들고 번번히 전공을 세웠으니 옛날의 명장이라 할지라도 공보다 나은 명장이 없었을 것이다." 

금호사 내부 이수생 장군 초상화.
금호사 내부 이수생 장군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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