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기마을 뒷산 가마자리 산재
한·일 도자기 교류 역사 담겨
“일본사발의 뿌리” 주장 제기




양산을 예부터 물이 풍부하고 좋은 흙이 많아 도자기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동면 내송리와 사송 일대에서 도기 제작이 시작됐고, 조선시대에도 가산리·화제리·법기리 둥에서 청자 및 백자 도요지가 운영됐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양산 일대의 요지에서는 중품의 분청사기들이 제작돼 진상됐다. 16세기로 넘어오면서 법기리 가마터 등에서 내수용과 수출용 품목의 백자와 다완이 대량 제작되기도 했다. 그렇게 제작된 자기들은 황산 나루터에서 낙동강 물줄기를 거슬러 영남대로를 거쳐 한양까지 운송됐고, 일부는 부산 왜관에서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법기리 요지는 동면 법기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가마터다. 오래 전부터 근처에 있는 창기마을의 이름을 붙인 ‘창기사발’을 만들던 가마터로 알려진 곳이며, 조선 중기인 16∼17세기경 지방에서 사용하던 백자를 만들던 곳이기도 하다. 요지는 이곳에서 ‘대매지리산’ 또는 ‘대매재’라고 불리는 법기리 마을 뒷산의 남쪽 사면에 있는 법기수원지 아래에서부터 본법부락 주우에 위치한다. 마을 뒷산의 기슭에서 산 윗부분까지 가마터가 여러 곳이 남아있는데, 사적으로 지정된 이곳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집과 무덤들이 들어서면서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근래는 대부분 논과 밭으로 개간됐다.
창기마을 뒤편 산 위의 유적에서 채집된 것은 주로 백자편이다. 그 중에는 낮은 온도에서 구워 표면이 녹청자 같은 것이 섞여 있다. 처음부터 백자가 아닌 것을 구우려 한 것인지, 아니면 태상 내에 철분이 많았기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발견되는 그릇 조각들을 보면 마을 근처에 있는 가마터는 대체적으로 17세기의 것이고, 산 쪽에 있는 가마터는 대부분 16세기경의 것이다. 아마도 산 윗쪽에 가마를 먼저 만들기 시작하고, 이후에 점차 아래로 내려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도자기의 형태는 대부분이 사발·대접·접시로, 만들어진 모양새가 거칠고 투박하여 좋은 질의 백자들은 아니었던 듯하다.
발견되는 백자들 가운데 굽의 형태나 백자의 질이 일반적인 다른 백자들과는 다른 종류가 보이는데, 이것은 일본의 주문을 받아 수출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찻잔으로 추정된다. 산록의 가마 터에서 채집된 파편 또한 모두 백자다. 산 위의 유적에서 채집된 백자보다 그릇이 투박하고 굽이 두터우며, 거의 안굽에 가까운 것이 많다. 대부분이 사발·대접·바래기 접시 등이다. 산 위와 산록 가마의 백자의 질은 모두 하품으로 회백색 또는 갈색을 띠고 있다. 또한 태토와 유약에 철분 등 잡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환원(還元)이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법기리 도요지’로 불렸던 명칭은 지난 2011년 법기리 ‘요지’로 명칭이 바뀌었다. 문화재청은 1963년 사적 지정 당시 법기리를 백자의 생산지로 추정했지만 최근 백자 뿐만 아니라 차 사발 생산지로 주목한 것이다. 법기리 요지는 전국에 산발적으로 분포한 요지 중에서 사적으로 지정된 요지로는 손꼽힌다. 법기리 가마터는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교류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곳이다.
지난 2006년 법기리 요지가 일본사발의 뿌리라는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일본 노무라 재단에서 사실확인을 위한 발굴 조사를 펼칠 예정이었으나 무산된바 있다. 당시 노무라재단의 발굴 비용 지원에 대한 반일 감정과 인근 지주들의 반대 때문이다. 이후에도 노무라재단은 매년 전문가를 파견해 일대를 답사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법기리 요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일본에서 국보급 찻잔으로 알려진 오기다완이 법기리에서 생산됐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찻잔의 질감을 잘 살린 것, 입이 닿는 부분의 자연미, 찻물이 베어 옅게 번지는 외모는 자연스러운 조선인의 성정을 그대로 닮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뿐만이 아니다. 임진왜란 후 공식 통관이 절멸된 상황에서 조선과 왜의 공식 무역도 차사발로 재개됐다. 왜인이 디자인한 주문서를 발주하고 조선에서는 이를 제작해 공급했다. 법기리에서 생산된 오기다완은 한국과 일본의 퓨전 작품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 경색된 한일관계를 성찰할 수 있는 지역으로서 가치를 갖으며, 전국에서도 유일무이하다. 부산 왜관이 설치되기 이전까지 약 30년간 무역이 진행됐으나 안타깝게도 부산의 요지는 경제개발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조선 초기, 일본에서는 차 문화가 급격히 번창했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의 도자기가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양산의 법기리에서 생산된 이라보 다완이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기여를 했다. 법기리 요지는 조선중기 임진왜란 이후 1607년 동래부사가 일본과 무역을 하기 위해 만든 곳으로 50~60년 간 운영되다 폐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사발과 대접, 접시 등은 전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당시 일본에서는 '주문 양산사발',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아 안달이 난다'라는 뜻의 '이라보(伊羅保)다완'과 '오기(吳器)다완'으로 불리며, 일본국보 26호인 '이도(井戶)다완'과 버금갈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라보’라는 말의 명칭에 대해 피부가 거칠거칠하다는 것과, 사마귀처럼 피부에 돌기가 있어 그렇다고 하는 이도 있다. 피부가 거칠거칠한 것을 일본어로는 ‘이라이라시이’라고 하고, 피부의 사마귀를 ‘이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라보의 종류로는 ‘고이라보’, ‘혼떼이라보’, '황이라보’, ‘구기보리’, ‘고혼이라보’ 등이 있다. ‘고이라보’는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 이미 존재했던 찻사발로 힘 있고, 소박한 조금 큰 것이 특징이다. ‘혼떼이이라보’는 고이라보를 조금 변형시킨 것으로 주문 찻사발의 중심에 있다. 이도 유약과 이라보 유약 등 성향이 다른 것을 조합해 만든 ‘가따미가와리’와 찻사발의 내면에 귀얄을 시문한 ‘우찌하케메’ 이라보가 있다. ‘황이라보’는 전반적으로 황색을 많이 띠고 있으며 ‘구기보리이라보’는 굽 안에서 밖으로 마치 못으로 긁은 듯한 소용돌이 문양이 새겨져 있다. ‘고혼이라보’는 두모포 왜간과 초량 왜관에서 만든 것을 말한다. 이는 법기리 일대에서 만든 이라보와는 구별된다.
이라보의 구체적인 특징은 언뜻 보면 이도 찻사발 형태로 힘이 있으며 구연부가 열려 있다. 강한 불에 소성돼 견고하며, 물레 자국이 선명하고 피부가 거칠거칠하다. 굽이 낮은 편이며, 죽절굽이 많고 약간 거친 모래 받침을 여러 개로 붙였다.
법기리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찻 사발은 ‘구기보리 이라보’다. 현재 국내에는 분류가 돼 있지 않아 일본 분류를 참조하고 있다. 이 찻사발은 철분이 많은 점토에 모래가 혼합된 독특한 태도를 사용했다. 굽 부분에서 허리에 걸친 칼자국 자리가 폭이 넓으며 차를 마실 때 입에 닿는 부분인 구연부 처리가 획일적이지 않아 자유정신을 추구하는 조선 사기장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법기리 요지’는 1963년 사적 100호로 지정됐지만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돼 왔다. 가마터가 더 발굴되면 한일 간의 도자 역사를 풀어주는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