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유의 지상 위에 詩 한 칸
배이유의 지상 위에 詩 한 칸
  • 배진숙 기자
  • 승인 2018.01.08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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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의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공구통을 뒤집니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튼튼한 놈들만 긁어모았습니다.

 

당신께 보냅니다.

 

내년엔 나도 열한 살이 됩니다.

열 살 때의 일들은 그냥 없던 걸로 합시다.

 

당신께 보냅니다.

즐거운 편지처럼

 

내년엔 나도 통통한 애인과 함께

오동도나 제주도

아니면 카프리 섬의 소형 버스 안에서

삼십대를 보냅니다.

 

껄렁한 이십대는 없던 걸로 합시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뾰족한 놈들만 당신께 보냅니다.

 

선물로 보냅니다.

 

내년엔 나도 여덟 살이 됩니다.

여덟 살의 나로 다시 돌아갑니다.

 

당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구멍을 뚫고, 튼튼한 나사못으로

당신이 가는 길을 막아버린 뒤

 

다시 아홉 살이 되면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내 인생의 공구통을 뒤지다가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내게 남겨진

당신과 나의 기나긴 이별의 편지를.

 

- 박상순의 ‘공구통을 뒤지다가’

⌜슬픈 감자 200그램⌟에 수록 -

 

 

*

 

글쎄 인생을 돌아보면, 철없던 어린 시절,

내가 누군가의 대못이 되거나

누군가가 나에게 대못이었거나

박히거나, 박은 기억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

문득 내 뾰족함의 죄상이 들춰봐지는 지금

망각에 묻혀버린 듯하나

추억의 공구통을 뒤지다 보면

기나긴 이별의 편린들이

가슴 한구석에 대못으로 여전히

꽂혀 있는 상흔이 생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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