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주 칼럼] 책이 여는 미래
[윤은주 칼럼] 책이 여는 미래
  • 이정윤 기자
  • 승인 2018.09.18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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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변화는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다
경남대학교 외래교수윤은주 논설위원
논설위원/경남대학교 외래교수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의 20대는 치열했다. 세상은 우리를 286세대라 불렀는데 나는 실제로 당시 200여만 원의 거금을 들여 286컴퓨터를 구입해서 쓴 경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지금의 인터넷 기술과 컴퓨터의 발달에 비추어 보면 어린아이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기능뿐인 그 컴퓨터를 쓰며 느꼈던 충족감과 문화적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2000년 1월에 나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문명에 입문했다. 내 인터넷 포털 아이디 younej21의 뒤에 붙은 숫자 21은 21세기의 초입에 만난 벼락같은 기술 문명의 충격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이 세기를 달려보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있다. 어른이 된 뒤 시간은 10년 단위로 흐른 듯하다. 세상은 우리 세대를 나이에 따라 386, 486등으로 높여 불렀고 급기야 나는 당시 펜티엄 급이라 불렸던 586세대가 되었다. 이 호칭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급이 높아진다는 것인지, 아니면 날로 낡아가며 급속히 기성화 되어가는 우리 세대에 대한 자조 섞인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월의 흐름을 온전히 담고 있는 말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우리들만큼 급격한 변화를 겪은 세대가 전에는 없었던 듯하다. 이제 286 컴퓨터의 추억은 저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간혹 나날이 새롭게 생겨나는 그 이름조차 낯선 신기술들을 보며 '과연 저만큼의 기술과 변화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인가?'하는 의문조차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기술 변화와 발전을 막을 수 없고 인간의 호기심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것이기에 좋든 싫든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해가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존재의 숙명이다.

혁명은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순간적이며 전격적인 변화요, 기존 질서를 뒤엎는 변혁이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고 창조론에서 진화론으로 과학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은 변화가 아니라 혁명의 결과이다. 현대의 4차 산업 혁명도 이런 급격하고 놀라운 혁명적 변혁을 담보하고 있는 말이다. 세상은 변해가고 그 속도는 눈으로 포착하지도 못할 만큼 급격하다. 블록체인, 가상 화폐, AI등의 말들은 익숙하지 못한 사람에게 모호하고 난해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런 기술은 누가 만들고 누가 상용화 시키는지 그저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볼 뿐이다. 그 놀라운 신기술들은 빛의 속도로 다가왔다가 더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간다. 마치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처럼 명멸하는 기술 앞에서 우리 범부들은 주눅 들고 소외감을 느낀다.

온갖 미래학자와 과학자들이 기술 혁명을 논하고 앞으로 다가올 사회의 변화를 예측한다. 더러는 우리의 미래가 모든 기술이 공유되고 모든 사람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부가 균등하게 분배되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 예측한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실업률이 50%가 넘고 기술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엄청난 격차로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갈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더 이상 일 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AI는 작동할 뿐, 일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쪽의 진단이 맞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미래 예측 자체가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조지오웰은 미래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가 '1984'를 썼던 1940년대에서 바라본 1984년은 공포와 혼돈의 대상이었다. 개인의 자유는 철저히 말살되고 전체주의가 철저히 개인을 지배하는 사회가 조지오웰이 생각한 미래의 모습이었다. 그가 생각한 1984년은 우리가 생각하는 2050년보다 훨씬 발전하고 비인간화된 사회였다. 하지만 그의 예측이 그대로 현실이 되지는 못했다. 사회 곳곳에 빅브라더와 같은 CCTV가 우리를 감시하고 디지털 계급 사회가 되긴 했으나 인간은 여전히 꿈꾸고 사랑하며 자유를 가장 중시하는 존재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기술은 우리를 편리하게 해준다. 사회 변화를 앞당기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경험과 교류의 장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엄청난 부의 기회를 제공한다. 인공 지능으로 논문 한 편 완성하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되었고 심지어 그 인공지능이 소설까지 척척 써내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에 기반 하지 않은 문학작품, 사람의 땀이 배지 않은 논문 한 편이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에게 인간다움이 없다면 과학기술이라는 것은 개인의 이기심과 탐욕을 추구하는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고 그 기술을 소유한 사람이 참된 철학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로 인해 어떤 폐해가 올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미묘한 존재이다. 끝없이 발전을 추구하며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하는가 하면, 모든 편리를 포기하고 가치를 위해 자신을 던질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왜 이런 극단적 이중성을 지니는 것일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대화'를 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당시 교황청의 억압에 어쩔 수 없이 천동설을 인정한 갈릴레이가 끝내 과학자의 양심을 버리지 않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주장한 장면에서 그의 친구인 사제는 말한다. '하늘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돌고 이 대자연을 주관하는 신의 존재가 인간에게서 거부당한다면 저 올리브 농부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올렸던 거룩한 기도가 모두 가치 없는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서 위안을 얻는단 말인가'라고.

지동설은 거부할 수 없는 과학의 진리이고 이제 과학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독교인조차도 창조론에 회의를 품는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는 과학의 위에 놓여있고 사람들은 과학기술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심각한 모순의 이면에서 잠시 혼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 미래 학자는 앞으로 2050년이 되면 대학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대학의 위기에 대해 깊이 공감이 간다. 이미 대학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각 대학들은 실용학문과 취업 교육을 위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교훈을 주는 인문학 전공 학과들을 앞 다퉈 폐지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철학관도 못 차리는 철학과와 국물도 없는 국문과, 사악한 취업률을 보이는 사학과를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이런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 백수의 지름길로 접어든 것인 양 걱정하고 책 한 권 읽을 시간에 토익점수 올리고 스펙 쌓느라 바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에서는 인문학의 열풍이 불고 있다. 왜 밥도 안 되는 인문학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곳곳에 인문학 강연과 독서 열풍이 물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삶에는 머리와 가슴이 똑 같이 필요하다. 머리만의 삶도, 가슴만의 삶도 공허하고 결핍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기술로 행복해지려면 기술의 바탕에 건강한 영혼이 필요하고 그 영혼은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책 읽기에서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다. 이제 디지털 기술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지만 더 가치 있는 디지털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책 읽고 사색하는 아날로그적 시간과의 균형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서 가치를 만들고 그 가치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독서로 단련된 건강한 영혼이 없다면 인간은 의사 결정의 주체에서 인공지능의 의사결정을 결재만 하는 존재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득세하고 과학과 기술이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은 읽고 쓰고 교류하는 현실 세계에서 더 궁극적인 행복을 꿈 꿀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멋진 스마트 기기를 소유했을 때 보다 인간으로서 좀 더 발전하고 이야기를 지닌 존재로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때이다.

이제 낡은 586세대가 된 나, younej21란 포털 아이디를 만들 때의 마음으로 열심히 21세기를 달리고 있지만 무딘 걸음으로 너무 빠른 기술의 진보를 따라가지 못해서 때로 헤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불행한 적은 없었다. 디지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가상화폐 투자를 못해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사색하고, 책 속의 지혜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일이 아쉽지, 온갖 기술들을 빠르게 섭렵하는 얼리어답터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 않다. 

책은 느리다. 하지만 그 느림에의 경험이  빠르지만 가벼운 디지털 혁명의 시대를 더 웅숭깊게 만들어줄 것을 믿는다. 책은 힘이 세다. 예전에도 지금도 세상을 바꾸어 온 것은 기술보다는 정신이요, 생각이다. 그 정신과 생각을 만드는 것이 바로 책, 내 손 안의 한 권 책이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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