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뇌관 '동아대 시위' 주도한 숨은 영웅
부마항쟁 뇌관 '동아대 시위' 주도한 숨은 영웅
  • 박정애 기자
  • 승인 2018.11.01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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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명 시작해 순식간 700명
이용수 씨, 경찰 교내 진입 막아
강용한 씨 결의문 낭독이 도화선

[가야·양산일보=박정애 기자]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1979년 10월 16일 일어난 부산대 시위였다면, 17일 동아대 시위는 도화선과 폭탄을 연결하는 뇌관이었다. 동아대 시위를 계기로 시민이 본격적으로 합류했고, 비로소 부마항쟁은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동아대 시위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국제신문은 그동안 취재 결과와 제보를 바탕으로 '부마항쟁의 뇌관' 동아대 시위를 시간대별로 정리했다. 그날 동아대 캠퍼스에는 이용수 유덕열 강용한 등 숨은 영웅이 있었다.

이동관(법학과 77학번) 씨 등 당시 사건 경험자의 진술을 종합하면 17일 오전 9시 학도호국단장 이용수는 도서관 앞 벤치에서 법대 시국토론 동아리 만우회 멤버인 이동관 등 4명과 함께 전날 있었던 부산대 시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용수가 먼저 "우리도 동참하자"고 제안했고, 이용관 김상준 배홍법 등도 호응했다.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동아대 시위의 중심인 잔디광장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20~30명이던 학생이 오전 10시께 200~300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잔디광장에 앉아 '선구자' '아침이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오전 11시께 학도호국단 간부 김호진이 인문대생을 이끌고 잔디광장으로 합류해 시위대는 700명가량으로 늘었다.

시위대는 학교 밖 진출을 꾀했다. 그러나 교문 밖에는 경찰이 막고 있었다. 시위대는 한때 교문 밖 30m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교문까지 밀렸다. 오전 11시30분 경찰은 학내 진입을 시도했지만, 이용수와 당시 학생처장인 신순기 교수가 경찰을 막아섰다. 이용수는 "내가 학도호국단 사단장이다. 학교는 신성한 곳이니 들어올 수 없다. 내가 책임지겠으니 철수하라"고 버텨 경찰의 학내 진입을 막았다.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시위는 소강 상태였다. 이용수와 별개로 한 시위대가 움직였다. 유덕열(정치외교학과 78학번) 김치영(법학과 79학번) 등의 말을 종합하면 오후 1시께 법정대 학생 100여 명은 오후 교련 수업을 받기 위해 강의실에 모였다. 이때 유덕열이 단상으로 올라 말했다. 유 씨는 "이런 나라가 어딨느냐. 교련 수업을 받을 수 없다"며 "밖으로 나가 시국에 대해 논하자"고 외쳤다. 이때 일부 학생은 "나가면 다 죽는다"고 말렸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나가자"고 동조했다. 당시 김 씨는 "누군가 교련시간에 나가자고 해서 나왔지만, 시위는 없었다. 모두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뿐"이라며 "엄중한 상황이고, 프락치도 많았기 때문에 누가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누군가 일어나 결의문을 읽었고, 구호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김 씨가 기억하는 정외과 1학년은 강용한(정외과 79학번) 씨였다. 강 씨는 국제신문 취재진에게 "미리 작성한 결의문은 아니었다. 누군가 나서는 사람이 없어 즉흥적으로 일어나 외친 것"이라고 말했다. 강 씨는 이날 잔디광장의 학생을 향해 3분 동안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일어났다. 우리의 배후에는 그 누구도 없다. 우리 스스로 분연히 일어선 자발적인 비폭력 시위"라며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새내기의 용감한 외침에 동아대생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모두 스크럼을 짜 운동장을 돌며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확산하자 오후 2시께 경찰은 교내에 다시 진입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고, 학생들은 구덕운동장과 경남고 방면으로 흩어졌다. 대부분 학생은 '오후 6시 부영극장 앞 재집결'이라는 말을 듣고, 오후 6시 부영극장에서 다시 만났다. 오후 7시 퇴근한 시민이 합류하면서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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