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효 칼럼] 박스 손잡이는 상대를 위한 큰 배려다
[안수효 칼럼] 박스 손잡이는 상대를 위한 큰 배려다
  • 안수효 논설위원
  • 승인 2021.03.0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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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효 논설위원(안전전문가, 가천대학교 안전교육연수원)
안수효 논설위원(안전전문가, 가천대학교 안전교육연수원)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일들이 이해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아주 큰 일로 다가오는 경우가 너무 많다. 택배비 30원 인상이라든지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뚫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상자에 손잡이 구멍만 있어도 노동자들이 상자를 들 때, 노동력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사고예방에도 큰 도움이 된다. 마트에서 햄이나 간장이 담긴 상자를 진열대로 옮기는 건 모두 노동자의 몫 이다. 진열대 뒤 보관창고에서 이런 작업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반복 된다. 상자에 손잡이 구멍만 있어도 노동자들이 상자를 들 때 많게는 40%까지 몸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통계가 많다. 손잡이만 생겨도 상자 무게가 최대 7㎏ 가벼워지는 생체역학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트 노동자가 나르는 상자의 평균 무게는 11.4kg, 무거운 건 30kg까지도 나간다. 하루 동안 이런 걸 345회 옮긴다는 조사도 있다.

2019년 10월 고용노동부 장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무거운 상자에다 손잡이를 설치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진행 속도는 더디다.

장관이 약속까지 했는데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구멍이 안 뚫렸다. 이쯤 되면 '구멍 하나가 뭐라고'라는 말이 나올 법 하다. 5kg 이상의 물건을 들기 위한 손잡이를 만들라는 건 이미 산업안전보건법에도 나와 있다. 최근 5년간(2015~2019년) 도·소매업의 근골격계 질환자는 3,100명으로, 전 산업 근골격계 질환자 31,510명의 9.8%를 차지한다. 이런 이유로 2019년부터 관련 노조를 중심으로 '마트 상자에 손잡이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높아졌다.

늦게 서야 정부는 지침을 마련해 상자에 손잡이 설치를 확대하기로 화답했지만 속도는 느리다. 특히 대형마트와 대형 유통업체는 자체 브랜드(PB) 상품에 대한 상자 손잡이 설치율을 현재 20.6%에서 올해부터는 평균 82.9%까지 대폭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별다른 손잡이 없이 상자를 들게 되면 손 어깨, 허리에 심각한 부담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구멍 손잡이를 뚫는 것만으로 허리 부담 10% 정도 덜 수 있고, 자세도 바르게 하면 최대 40% 신체 부담 줄어든다.

이렇게 노동자 건강 지키자는 취지는 알겠는데, 그러다 먹거리 담긴 상자에 벌레가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 할 수도 있다. 대형 유통업체는 자체 브랜드(PB) 상품에 대한 상자 손잡이 설치율을 현재 20.6%에서 내년 평균 82.9%까지 대폭 확대한다.

일부에서는 상자에 손잡이 뚫게 되면 추가비용 문제를 숨기고 ‘벌레’ 같은 위생상 우려가 있다는 주장을 겉면에 내세우고 있다. 사실 마트에서는 신선도 유지가 필요한 제품의 경우 이미 구멍이 뚫린 상자로 유통이 이뤄지고 있어 큰 문제 아니란 평가다. 대표적인 것이 채소, 과일 제품들은 이미 구멍이 뚫려있다. 신선제품의 경우 구멍이 없으면 신선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공개한 '상자 손잡이 가이드'에 따르면, 상자에 설치할 수 있는 손잡이의 형태는 각 사업장이 자유롭게 정할 수 있도록 했다. 블록형· 서랍형 손잡이 등도 설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멍형 손잡이 가운데서는 이물질 유입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 할 때만 꺾어서 쓰는 반접이형 손잡이도 있기 때문에 벌레 유입에 따른 우려는 핑계다.

문제는 일반 택배들인데 우체국 택배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형상자만 구멍 손잡이 도입했다. 외국의 사례는 오래되었다. 미국은 지난 2007년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상자에 구멍 손잡이를 만들라고 지침을 마련했다. 우리 정부는 이제야 구멍 손잡이 이렇게 하라고 지침 만들었지만, 외국에서는 이미 표준으로 자리 잡혔다.

구멍 손잡이 문제, 돈이 든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건강을 희생 시켜 온 대표적 사례다. 현행법상 5kg 넘는 물건 들 때 손잡이 쓰게 하라는 게 사업자 의무지만, 일터에선 잘 지켜지지 않았다. 정부는 이 구멍 손잡이를 '착한 손잡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오래전부터 필요했던 '당연한 손잡이'라는 것이다. 상자를 장시간 들고 옮기고 노동자들에게는 손잡이는 단순히 액세사리가 아니라 건강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배려가 많아질 때 상대를 존중하고 건강한 나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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