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살 어린 딸을 두고 가시면서 얼마나 가슴 아프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나직이 되뇐 한 마디 말 때문에 눈물이 그렁해져서, 남이 볼까 싶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우리 가족은 올해부터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고 성당에 위령미사를 드린다. 그런데 실수로 돌아가신 조상님들 중에 외할머니를 빠뜨려 버렸다. 이를 아신 어머니가 깜짝 놀라, 나와 동생이 성묘하는 중에 다급히 전화하신 것이다. 외할머니 산소에 꼭 성묘하라고.
동생과 외할머니 산소에 성묘하면서 지난 번 어머니와 함께 산소에 들렀던 때가 생각났다. 꼬부라진 허리와 밖으로 휜 다리를 끌고 지팡이를 짚고 높은 턱을 오르셨다. 88세에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언덕에 있는 산소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걷기 힘겨움에도 그 턱을 오르실 때는 희미한 어렸을 적의 기억을 더듬으며 ‘엄마’를 찾아 가셨을 것이다. 무릎이 아파서 절은 못 하시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구부러진 허리를 굽혀 절을 대신하시는 어머니.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회한이 지나가셨을까.
산소에서 돌아서면서 몇 번을 돌아보시는 모습. 길러주신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정이 있겠지만, 10개월을 뱃속에 품으면서 수없이 배를 쓰다듬던 손길, 낳아서 애지중지 소중히 젖을 먹여주시고 보듬어 주신 어머니의 손길은 절대로 잊어지지 않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4살배기 어린 외동딸을 남겨두고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로 어머니는 엄마가 올까하고 매일 동구 밖에 나가서 먼 길을 바라보셨다고 한다. 그 장면을 생각할수록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애끓어 올라온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새 아내를 얻었는데, 어머니 말로는 새어머니가 참 잘 해주셨다고 한다. 하지만 친엄마를 잃은 가슴속의 허전함은 그 무엇으로도 메꾸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그리움을 안은 채 80여 평생을 외할머니 산소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엄마 잃은 슬픔과 허전함을 나는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조금이라도 느낄 수가 있다. 그 느낌의 몇 십 배, 몇 백 배라고 생각하면 맞지 않을까. 내가 주변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큰 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어렸을 적부터 환갑이 된 지금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엄마’의 정을 담뿍 받은 것에 감사하고 있다.
어머니는 당신이 안 계시면 외할머니 산소를 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에 항상 걱정을 하신다. 하여 나는 마음속으로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가 안 계시더라도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렁한 눈물을 닦고 돌아서 온다.
어머니가 ‘엄마’를 찾아 걸어가신 길을 나는 기억한다. 나도 나중에 그 길을 똑 같이 걸어갈 것이다. ‘엄마’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