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탁기 한 대가 집에서 떠나간다. 10여 년 간 우리 가족의 빨래를 빨아주던 일꾼이 수명을 다하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다. 억센 손에 이끌려 대문을 나서는 세탁기, 떠나기 싫어 대문을 붙들고 버티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탁기를 수거하는 사람들이 막 다루는 것 같아 한 마디 했다. “사장님, 폐품이라도 좀 살살 다루시죠.” 트럭에 옮겨져 떠나가는 세탁기를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세탁기는 많은 빨래를 맡겨도 군말 없이 묵묵히 해내는 일꾼이었다. 매일 일만 시키다가 고장 나서 쓸모가 없어지자 버려지는 신세가 된 세탁기. 해체되고 나면 쓸 수 있는 부품은 다른 중고 세탁기의 일부분이 되겠고, 쓸 수 없는 부품은 모두 재생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골목을 들어서면, 큰 길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우물 하나가 있었다. 동네 아낙네들이 거기서 빨래를 주로 했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이나 놀다가 목이 마를 때면 나와 친구들은 언제나 그곳에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지금도 아낙네들이 모여 앉아 빨래하며 이야기 나누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그 아낙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 어머니도 가끔 거기서 빨래를 하셨다.
주부라면 누구나 밥 짓고 빨래하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고 살던 시절, 가족들의 더러워진 옷을 빠는 것이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밖에서 우리가 개구지게 놀다가 더럽혀 놓은 흙 뭍은 옷도 아무 말 없이 빨아 주셨던 어머니. 집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빨래를 모두 찾아내어 커다란 고무다라에 넣고 물에 담가 불린 후, 때가 불은 빨래를 하나하나 빨래 방망이로 두드려 빨았었다. 빨래 방망이가 내리쳐질 때마다 빨래에서 물이 튀고, 더러운 옷을 빨 때는 땟물이 시커멓게 나왔다. 어머니는 빨래를 두들길 때마다 한 손으로는 계속 빨래를 뒤집으시면서 땟물을 골고루 빼셨다. 그리고 가끔은 나를 시켜 빨래 짜는 것을 거들게 하셨다. 바지랑대에 걸려있는 빨래 줄에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가족들의 빨래를 묵묵히 빨아주셨던 어머니의 손길을 요즘은 세탁기가 도맡아 하고 있다. 어머니에게는 가끔 감사하는 마음이라도 갖겠지만, 세탁기의 노고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고장 나면 바꾸면 되는 가전제품의 하나로 취급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수명을 다하고 떠나가는 세탁기에 정이 들어서인지, 그 동안의 노고를 잠시 생각하게 된다. 떠나가는 세탁기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고맙다 세탁기야”하고 한 마디 했다.
만약 이 세상의 세탁기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그 노고에 대해 잠시 생각할 것이다. 무언가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다가, 갑자기 없어지기라도 하면 없는 자리의 공허감이 크게 되고 소중함도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떠나가는 세탁기를 바라보며, 한겨울에도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빨래를 해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어린다. 그러기에 실려 가는 세탁기가 더욱 안쓰럽게 느껴진다. 혹시 어머니의 노고를 아무 감정 없이 세월 속으로 떠나보낸 것은 아닌지...
나는 가끔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발코니에 다가가서 슬쩍 둘러보게 된다.